알게 뭐람

일을 하다보면 그 회사에서 제일 처음 무언가를 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해당 제품의 기능을 실제로 운영환경에서 사용하기 전에 테스트 하는 일처럼 말이다. 아니면 어떤 제안이나 이야기들을 들었을 때 맥락적으로 이해하고 설명, 의문 제시를 하는 사람을 이야기한다.

대기업은 어떤지 모른다. 사람들이 묘사하는 대기업은 천차만별인데 정말로 그런 사람이 있을 때, 그렇게 호기심 많고 높은 확률로 주변과 트러블도 있는 사람이 있을 때 대기업의 시스템에 적응할지, 순응할지, 그냥 갑갑하다며 나갈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중소기업도 비슷한 것 같으니 이건 그 회사의 문화나 일을 하는 방식의 차이라고 이야기하는게 맞을 것이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그 사람은 이번 회사에서는 나였던 모양이다. 입사하자마자 업무 일정 공유가 미비한데 구글 워크스페이스를 쓰길래 워크스페이스 공유 캘린더를 쓰자고 이야기한 것부터 vConverter를 사용한 p2v 데모까지 지금 회사에서의 일련의 새로운 시도는 나로부터 나오고 있었다.

주변에 이런 이야기를 하면 연봉을 이야기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우리회사에서 제일 연봉이 적은 편이며 또래에 비해서는 많은 편이다. 객관적으로 내가 받는 연봉은 사무직에 비해서는 많고, IT 엔지니어들 중에 보통인 편이다. 프로그래머들에 비해서는 어떤지 모르겠다. 워낙 천차만별이기도 하고 나는 프로그래머들 연봉이 고평가 되어 있으며, 젊음과 열정-일중독을 매개로 서로 쓰고 쓰이고 버려진다 라고 생각한다. 사실 연봉은 올리는 것보단 유지하는 게 어려우며 이직을 할 때 연봉을 올리더라도 다음 연봉 협상 때 동결-축소 될 수 있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고평가된 지금 연봉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번아웃 굴레에 발을 들이는 일을 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연봉이 그리 높지도 않으며 업무적인 평가는 좋음에도 동기보다 연봉이 낮음에 대해 별로 불평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재 조직을 위해서 개선점이나 새로운 시도를 한다. 나는 일한지 7년 정도 되었고, 비슷하고도 다른 일을 여러 개 했다. 젊은 대표이사와 한 살 차이로 줄줄이 있는 회사에서도 일해보고, 지금은 경직되었지만 시대를 풍미했었던 회사에서도 일했다.

그렇게 일하면서 느끼기로 그냥 그게 내 일이라고 생각한다. 일에는 여러 종류가 있고 그렇기에 사람마다 잘하는 일이 다르다. 누군가는 메일, 고객과 소통, 관리를 잘할 것이고, 누군가는 문서 작성, 누군가는 흔히 이야기하는 삽질을 잘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새로운 것들을 이것저것 하는 것은 잘하는데 문서 작성은 꼼꼼하게 못하고 양식만 만들고 적당히 내용을 채워주면 나머지는 누군가가 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편이다.

그리고 나는 삶의 대부분의 것들은 익숙함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단하네, 잘했네 라는 칭찬과는 별개로 그냥 아 내가 할 일이기 때문에 했을 뿐 이라는 생각을 했다.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나도 문서 작성이나 관리에 있어서 하다보면 어떤 노하우나 적절한 행동 양식과 도구를 갖추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새는 알게 뭐람 이라는 생각이 자주 든다. 모든 시스템-하드웨어-소프트웨어-심지어 기술자 까지도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소모품이고 대체 가능하다. 일례로 게임용 컴퓨터는 CPU가 고장났다는 말 듣기 어렵지만 서버 쪽에서는 고장난다. 살면서 한 번 겪어보기도 어려운 운영체제 버그를 작업할 때마다 밟는게 비즈니스이고 이런 환경에서 개인의 기술과 기능이라는 것은 지금 회사에서 적합한 것이지 다른 회사에서 FIT 하게 맞기는 어렵다. 업계에 통용되는 지식이라는 것도 조금 의아하다. 서버 OS 대다수는 리눅스지만 리눅스는 커널이지 OS가 아니므로 운영체제 마다의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더러 같은 리눅스에서 돌아가는 같은 프로그램이라도 가상 환경, 클라우드, 베어메탈에서 돌아가는 환경 차이에 따라 관리 포인트와 내용은 분명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시스템의 부품으로 돌아가고 그 시스템은 현재 조직의 상태에 최적화 되어 있는 편이므로 개인의 기술과 기능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그 조직에 최적화된 기술과 기능이며 업계 안에서 조직을 옮기더라도 그 조직에 최적화된 다른 기술과 기능을 적응해야하며 요새는 한 조직에 오래 다니는 사람이 드문 편이므로 연차와 직급이 주는 의미란 그저 그 조직에 더 최적화 되어 있거나 다른 조직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 조직의 시스템을 개편-관리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니 알게 뭐람이라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뉴타닉스는 보통 고객들이 파트너사를 통해 납품 받고 유지보수 지원을 받는다. 운영이나 업그레이드 중에 문제가 생기면 파트너사에서 뉴타닉스 쪽에 케이스를 연다. 티켓을 끊는다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어쨌든 고객센터에서 지원을 받는 것이다. 그러면 한국에서 지원하는게 아니라 뉴타닉스 글로벌 엔지니어들 중에 현재 일하는 시간대의 엔지니어들이 배당 받아서 처리를 해준다. 주로 메일을 통해 소통하고, 영어를 통해 소통한다. 그러다보니 제 1세계, 서구와 한국의 일처리가 제법 많이 다르다고 느낀다.

비즈니스 환경에서는 모든 게 소모품이고 부품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 대체 가능하도록 시스템을 설계한다. 하드웨어 부품이 고장날 때를 대비에 여러 개의 하드웨어를 논리적으로 연동하고 하나 처럼 사용하고, 이중화를 한다. 소프트웨어 또한 미리 빌드테스트를 하고 GIT이나 SVN 처럼 형상관리 툴을 사용하여 롤백이 가능하고 버전관리가 가능하게 만든다. 사람 또한 내가 연차나 자리를 비울 때 대체할 수 있는 인원을 구비했으면 좋겠지만, 어쨌든 시스템이 잘 갖춘 기업은 하는 편이다. 한국은 압축 성장을 겪은 만큼 개개인의 능력치의 초점을 두고 IMF 등을 통해 대체 불가능성에 대해서 노동자들도 많이 고민하는 편이다. 대체 가능한 순간 일자리의 안정성을 보장 받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런 경우가 종종 있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수직적인 구조에서 일이 진행되다 보니 이하 갑에게 보고할 때 원활하게 하기 위해 중간에서는 이하 병을 괴롭힐 수 밖에 없다.

보통 IT 인프라는 갑(대기업 현업)-을(대기업 계열 IT 사 인프라 담당)-병(파트너사 혹은 교대근무 사내 협력사,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음)-정(인프라 제조사 파트너사) 형태로 돌아간다. 이미 서비스와 하드웨어는 이중화가 되어 있다. 뉴타닉스 엔지니어는 현재 안 되는 뉴타닉스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문제를 해결하고 원인을 대략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일이다. 여기서 대략적으로 하는 이유는 컴퓨터의 특성상 로그를 통해 분석하는 것은 한계가 있으며 온전히 분석하기 위해서는 메모리 덤프라도 떠서 CPU 클럭 단위로 분석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전기와 기계와 다르게 컴퓨터는 해당 시각에 구체적으로 동작을 했는지는 적혀 있어도 그것이 어떤 알고리즘이나 어떤 프로그램 동작, 논리에 의해서 그런 동작을 했는지는 분석하기 어렵고, 재현하기 어렵다. 그냥 단순한 비즈니스 서비스가 아니라 OS나 클러스터링 같은 프로그램인 경우에는 더더욱.

하지만 IT 인프라는 갑-을-병 의 형태로 돌아가다보니 이슈 재발에 있어서 민감하다. 갑은 당연히 ‘을’ 을 평가함에 있어서 장애 이슈를 까다롭게 볼 것이다. 동시에 본인들이 직접 운영을 안해 잘 모르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것들을 서류로 문서화 시켜놓고 싶을 것이다. 그래야 대체 가능하니까. 사족으로 하지만 정말 돈이 많고 중요한 서비스면 뭐 대충 가용성 99.9999 같은 걸 보장하는 AWS 에서 월에 1억씩 쓰겠지 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뉴타닉스 엔지니어 입장에서는 그런 갑의 세세한 질문 같은 건 중요하지도 않고 현실적으로 사후 분석이라 가능하지도 않다. 재현이 불가능하고 그때 당시 로그만으로 분석하는 거니까 그리고 본인들 입장에선 이미 서비스도 이중화 되어 있을 거고 혹은 실제로 유저 VM 서비스에는 문제가 없는데 파트너사인 우리가 징징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솔직히 내 입장은 알게 뭐람이다.

알게 뭐람, 어차피 웹서버도 2대, 웹어플리케이션 서버도 2대에서 3대, 데이터베이스 서버도 이중화 되어 있고, 서비스도 문제 없는데 업그레이드 중에 문제 생긴 것 조치도 되었고 대략적인 문제도 나왔는데 프로세스가 폭주해서 KILL 당한 게 특이 케이스라는 것도 나왔는데 왜 그렇게 프로세스에 부하가 몰려서 KILL 당했는지 알게 뭐람, 몇 년간 문제 없이 쓰던 백업이 이번에만 프로세스 폭주의 원인이 되었는지 알게 뭐람, 저희는 바꾼 거 없어요 ^^, 그럼 저희는 건드린게 있나요.?? 약간 이런 느낌이다.

일에 있어서는 별로 미안하다는 말 하고 싶지 않다. 최대한 선해해서 기업의 담당자로서가 아니라 노동자 개인의 입장으로서 그냥 바라는대로 해주는 편이다. 당연히 메일에서 돌아오는 답변도 그렇고 우리도 억지라는 건 알지만 어차피 우리는 대체 가능한 부품이고 서로 일할 때 굳이 뻗대보아야 별로 좋은 꼴 나지 않는다는 거 아니까 동시에 담당자들도 어느 정도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단지 우리는 을의 담당자와 병의 담당자라는 탈을 썼을 뿐. 그래서 미안하다는 말도 별로 하고 싶지 않다. 인간이 사는 모습이라는게 고만고만하다는 것도 있고 그냥 하루하루 보내면 그걸로 됐지 않나 라는 생각도 있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알빠노와는 다른 결이다. 알빠노는 상대를 존중하지 않고 니 의견 궁금하지 않다의 결이라면 이건 내가 일하는 건 일하는 건데 삶이라는 건 무상하니 그렇게 생각이 복잡하고 많고 짜증낼 필요가 없다의 결이다.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한가 싶기도 하고 뭐 알게 뭐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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