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리셋 증후군이 있었었는지 뭔가 맘에 안 들면 새롭게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살아보니 새롭게 시작하는 건 허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새롭게 시작해도 기억이 남아있고, 기억이 없어도 신체와 환경이 남아있습니다. 신체와 환경마저 없다면, 그건 누구라고 부를지에 대한 어려운 이야기를 해야합니다. 우리가 시간 속에서 지낸 벡터를 기록하는 것이 기억이라면, 그건 어떤 형태든 존재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저 살던대로 살 수 밖에 없는 걸까요?

그건 분명히 아닐 겁니다. 어쨌든 우리는 바뀝니다. 어제까지는 돈까스를 먹을 때 망설이지 않았던 제가 혈액 검사 결과를 듣고 먹을 때 망설이는 것처럼

이거에 대한 답은 아니지만, 가이드를 본 적이 있습니다. 로버트 맥기의 시나리오 어떻게 써야하는가 라는 책에 보면 인간은 자기가 바뀌어야하는 상황이 되어야지만 바뀌며, 그렇기 때문에 시나리오 상 등장인물들이 바뀔 수 있는 상황 전개 및 위기를 주어야한다. 라는 논지로 몇 꼭지 적었습니다.

전 최근 일련의 사건들이 무척 웃기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두 번의 주문을 외웠습니다. 저는 최근 건강을 무척 신경 쓰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대한민국의 정치적 역동성이 불안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저는 제 생활 양식이 종종 급격하게 바뀌는 것이 불안합니다.

누군가는 주문이 끝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저는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가 이직을 하고, 대학을 다니고, 대학을 졸업하면 끝이라고 이제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그렇지 않듯이

시계를 돌려 2024년 12월 3일로 돌려봅니다. 자전거를 타고 산책을 하다가 오늘은 왠지 일찍 돌아와야할 것 같은 날, 저는 애인과 친구들에게 연락을 많이 받아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계엄을 겪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고, 결국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습니다. 그 후 일련의 사건들은 저에게 신좌파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 같았습니다. 퀴어 운동 등에서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으나 메이저한 사회 운동에서 주목하지 않았던 스펙트럼의 주목이 분명 그렇게 보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말벌 동지가 되었고, 우리는 연대의 가치를 재확인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떤 기억들은 그 이전 시대를 살 수 없게 만듭니다. 터닝포인트 라는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삶과 생각이 송두리째 바뀌게 됩니다. 그런 사건들이 누구나 여럿 있겠지만 저는 2024년과 2025년이 특히 그러할 것 같습니다.

이야기가 길었습니다. 저희는 또 주문을 외웠습니다. 충분히 축하하고 격려하였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이것이 승리나 끝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계속 삶을 살아가고 있고 삶은 고쳐쓰는 것이다 라는 생각이 요근래 계속 듭니다. 이야기는 끝나고 삶은 계속 되니까요. 하지만 이건 저의 생각이 그러한거고, 메일을 읽으시는 분들의 생각 또한 비슷하게 끝이 아닌 시작이라고 생각하실 것 같습니다. 제가 저에게 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와서, 새롭게 시작하는 건 허상이다. 라는 생각은 인프라 엔지니어를 하면서 강하게 느낍니다. 왜 고객들이 낡은 장비와 프로그램을 새로 설치할 수 없는지, 새로운 회사로 인수 되어도 내부 전산은 통합하는데 3년이나 걸리는지, 왜 나는 여전히 이직해도 비슷한 삶의 느낌을 가지는지, 결국 나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없고, 나는 나라는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객체와 바운더리 속에서 계속 유지되고 있었고, 그것은 고쳐 쓸 수 있지만 온전히 새롭긴 어렵다. 라는 결론을 내게 됩니다. 이는 동일한 서비스, 동일한 장비여도 고객사에 따라 다른 퍼포먼스와 다른 요구사항,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가 종종 새파랗게 어리다는게 축복처럼 느껴집니다. 그렇기에 이직도 하고,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무사히 적응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는 노인의 지혜와 통찰이 통하는 시대가 갔다 라는 해석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모두 노인이 됩니다. 그렇지만 삶은 그렇게 빠른 속도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금융쪽은 보통 제대로 하려면 영업일 기준으로 10일이 필요하고, 투자나 상환은 보통 성과를 보려면 3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빛에 정보를 실어 통신할 수 있는 시대를 맞이함으로써 엄청 빠른 시대에 살고 있지만 빛은 우주 단위에서 생각보다 그렇게 빠르지 않다는 것까지 고려해본다면 삶이라는 것은 원래 그렇게 빠르지 않고, 조급해하지 않아도 되고, 천천히 고쳐쓸 수 있으며 내가 맘에 들지 않아도 천천히 개선할 수 있다 라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삶은 새롭게 시작할 수는 없지만 개선할 수 있고, 그 속도가 빠르지 않아도 된다 라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쓰다보니 실수로 보내기 버튼을 눌러서 미완성의 메일이 가게된 점 너른 양해 부탁드립니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현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