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인프라엔지니어의 초상
같은 이야기를 맘이 풀릴 때까지 몇 번이고 하는 버릇이 있다. 어쩔 수 없다. 나에게는 나의 많은 부분들을 설명해야한다는 강박 같은 게 있나보다. 마음이 풀리면 더이상 그 이야기는 하지 않고, 지겨워 한다. 오늘은 또 일 그러니까 인프라 엔지니어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첫 직장으로는 PLC 프로그래밍을 했었고, 그 뒤로는 리눅스 호스팅 서버 운영, 뉴타닉스를 거쳐 지금은 시스코 SAN 스위치와 UCS 를 하고 있다. 나는 전통적으로 하드웨어를 다루었으며, 소프트웨어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간단한 읽기 정도만 할 수 있다. 동시에 컴퓨터 과학 지식에 관심이 많다. 이게 괴리가 생기는 포인트다.
나에게 그동안 컴퓨터 오타쿠라는 사람들은 FOSS에 기여하였으며, 인생의 대부분을 컴퓨터와 프로그래밍에 시간을 쏟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없다. 나에게는 일상도 소중할 뿐더러 같이 지내는 사람들, 지켜야할 사람들도 있다. 내가 그 사람들과 일상을 다 제치고 컴퓨터와 프로그래밍에 몰두하겠다는 말은 삶을 내팽겨치고 전자계산기에 올인하겠다는 말과 같다. 나는 밸런스가 매우 중요한 사람이고 그런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럼 내가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걸 알았으니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내가 왜 프로그래밍을 해야한다고 생각했는지, 그것이 나에게 어떤 불안을 야기했는지에 대해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일단 주변에 IT 하는 사람들이 다 프로그래머였고, 컴퓨터 오타쿠였으며, FOSS에 기여하였으며, 홈서버도 당연히 운영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거기서 위기감을 느꼈다. 결국 프로그래머가 인프라 엔지니어를 대체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요새는 클라우드 인프라나 IaC 가 빠르게 도입되고 DevOps 수요가 크게 성장하면서 전통적인 하드웨어 엔지니어 수요에 대한 위기감을 느꼈다.
쓰고 보니 그게 전부다. 프로그래머나 DevOps가 내가 하는 일을 대체할거라는 불안감, 완전히 대체하지 못하더라도 내가 시대에 뒤쳐져서 결국 적은 양의 수요 틈바구니에서 살아야하는 불안감, 그로 인한 수입 저하가 불안요소이다. 나는 내가 신용회복위원회를 갔다온 이후로 생존주의적 압박을 느끼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불안요소이다.
또한 하드웨어 엔지니어는 구축을 주로 하게 되는데 하드웨어 구축 일은 끊임없이 발주가 들어와야한다. 그건 회사 영업 담당들의 몫이지만, 작은 회사들은 그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고, 유지보수비용으로 매출을 일으켜서 과하게 많은 사이트를 맡거나 유지보수가 제대로 안 된 사이트를 유지보수하게 되거나, 장애처리를 하루에 몇 군데 이상하게 될 수도 있다. 지금 회사는 제법 큰 회사이고, 거래처도, 팀원들도 안정적이기 때문에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기 때문에 비로소 이 불안을 정리하고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 다행히 회사 내부 교육도 잘 되어 있고, 트렌드 있는 기술 사용법들과 개요를 배울 수 있다.
SAN 스위치 유지보수를 메인으로 하게 되는 것이 불안요소라고도 생각했다. 서버를 하는 것도 아니고, 스토리지를 하는 것도 아닌 SAN 스위치를 하는 게 경쟁력 있는 건가? 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막상 업계를 둘러보니 SAN 스위치는 필수불가결한 존재이다. 아직 iSCSI 가 고속 대용량 데이터를 처리하기엔 오버헤드가 너무 크고, 스토리지를 사용하면 FC를 사용하기 때문에 SAN 스위치를 필요로 한다. SAN 스위치는 신뢰성 있는 제조사도 많지 않다. 그렇다고 설정이 크게 어려운 것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크게 불안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차근차근 정리를 해보니 프로그래머가 되기 위해, 혹은 실무에 사용하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다행히 여러가지 하드웨어 플랫폼도 다루었고, 리눅스도 크게 무리없이 할 줄 안다. 나는 내가 좁고 깊게 해야한다고 생각했는데 넓고 얉게 대신 적재적소에 적절한 자원들을 배치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그런 일을 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이상 불안할 이유가 없다. 하드웨어 시장도 생각보다 크게 줄지 않을 것이다. 온프레스 수요는 고정적으로 존재하고, 데이터는 점점 더 중요하게 다룰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스스로에게 아쉬운 것은 네트워크 지식과 자동화, 컨테이너 정도이다. 그건 중요하지만 우선 순위가 낮다. 일단은 대학교 졸업이 먼저다. 그리고 적당히 정보처리기사를 따고 고민해도 늦지 않다. 이렇게까지 정리하니 나는 내가 무엇 때문에 불안해했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미약하게나마 잔잔하게 불안함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금 일이 완전 5년 뒤에 전부 사라질 것 같은 불안감에서 잔잔한 파도 정도가 되었다. 삶에서 이정도 불안은 다들 있고, 허용된다고 생각한다.
늘 그러하듯 나에겐 나의 길이 있을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 어떤 길인지 몰라도,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차분히 하면 무언가 또 길이 보일 것이다. 요즘은 너무 급하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며 브레이크를 많이 세운다. 생각보다 조급함은 사람을 크게 망치고 터널 시야로 빨아들인다. 그런 모습을 찬찬히 개선하고 있는 요즘이다. 그런 삶 역시도 급격하게 바뀔 수 없기 때문에 더디지만 무겁게 나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