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필했지만 재주는 아깝잖아?
‘나 마침내 절필할 수 있을 것 같아, 더 이상 드디어 치열한 결핍과 불안에 대해서 글을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나의 글쓰기 역사에서 2014년은 0.1 프로토 타입이다. 그때 지혜의 숲이라고 하는 논술 학원을 다녔다. 2시간짜리 강의였는데 첫 한 시간은 그 주 동안 읽어야 하는 책을 읽고 에세이를 쓴 걸 발표하고 자유롭게 피드백을 주고받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두 번째 시간은 선생님이 다음주에 읽고 글을 쓸 책의 키워드와 맥락들을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살면서 그 때 처음으로 글을 썼다. 그게 나의 글쓰기 0.1 이다. 그리고는 2015년부터 2018년이다. 이때는 취업을 위해 자기소개서를 쓰는 일을 했다. 이건 릴리즈 1.0 프로덕트 타입 1세대이다. 나의 이야기를 팔고, 정돈하면서 내가 왜 이런 전공을 택했는지, 내가 왜 이런 일을 하고 싶은 지,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썼다. 나는 프로토타입과 프로덕트 사이에서 굉장한 괴리를 느꼈다. 결국 입사 지원을 위한 자기 소개서는 내가 아니라 상업용으로 다듬어진 나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1.0 이다.
2018년 이후부터 지금까지가 프로덕트 2.0 이다. 2.0에는 나의 20대가 모조리 들어가 있다. 새로운 시도를 하지만 그 글의 본질은 나를 설명하는 것, 나의 감정, 불안을 설명하는 것에 있었다. 늦은 사춘기를 보낸 내가 치열하게 고민하고 사랑하고 아름다워 했던 모든 것들이 2.0 안에 있다. 2.0은 2023년쯤을 분기로 2.5 버전과 2.0 버전으로 나뉘는데 2.0의 주 스탠스는 내가 이렇게 사는게 힘들지만 살아간다의 느낌이라면 2.5 버전은 내가 이렇게 멋지고 아름답고, 힘들지만 살아간다 가 주된 이야기였다.
그리고 마침내 3.0 Beta 라고 선언할 수 있을 것 같고, 이것은 나에게 절필적 의미이다.
나에게 글은 기본적으로 나를 스냅샷해서 그걸 남에게 설명하는 일이었다. 나라는 사람에 대한 도슨트이자 큐레이팅이었고, 그런 설명을 하는데 글 만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무수히 많은 주제에 대해 글을 써도 결국 내 이야기로 회귀하였고, 내가 찾은 문장들을 맥락 적절하게 풀어 놓았다. 그것이 나에게 글쓰기였지만 이제 그렇게 글을 쓰지도 않을 것이고, 글들이 잘 공개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을 아주 거칠게 절필이라고 표현했다.
기본적으로 나의 글들은 나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고, 남에게 설명하는 글이기 때문에 남의 눈치를 보게 된다. 그것을 하지 않겠다. 라는 것이 일단 2.0과 3.0의 다른 점이고, 더 이상 내가 불안과 결핍에 대해 글을 쓰지 않아도 되겠다 라는 생각을 가진 것이 2.0과 3.0의 다른 점이다. 나는 오랫동안 이 시간이 왔어야 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과연 내가 나의 결핍이 아니면 무슨 글을 쓸 수 있고, 그게 내가 다른 글들과 어떤 차이점을 발휘할 수 있을지 몰라서 망설였다.
하지만 상관없지 않을까? 내 글이 꼭 남과 달라야 할까? 누군가의 사유를 재확인하고 누군가가 지겹도록 재해석한 것을 확인하는 것이어도 충분하지 않을까? 모든 예술가들은 마침내 자기가 할 이야기가 다 떨어진 시기가 온다. 마침내 자기를 다 팔아버렸다는 시기가 온다. 나에게 그 시기가 온 것이다. 이제 그 때가 작품을 정말 재밌게 만들 수 있는 시기라는 것을 알고, 그 시기가 힘들다는 것도 안다. 이제 나는 나니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지나, 조금 더 예술적이고 위험한 글들을 쓰고 싶다. 나는 사회적 주제에 대해 거의 말을 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 것보단 개인의 경험이 안전하니까, 나는 비난과 비판을 무서워하니까, 하지만 괜찮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시작은 읽은 책들에 대한 후기들이 될 것이다.
나는 이 변화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요새는 그저 내 세상이 롤러코스터처럼 바뀌고 있고, 드르륵 바뀌고 있다. 변화는 시작되었고, 나는 그걸 탐험하고 업데이트 하고 있다. 나는 그동안 나의 직관을 끝까지 사용해서 많은 일들을 해왔는데, 그 많은 일 들에는 글쓰기와 탐험도 있었다. 하지만 이젠 역부족이다. 나의 직관의 한계를 명확히 알게 되는 시점이 왔고, 그래서 글을 읽으려고 하고, 그 글들은 인문사회와 철학이 될 것이다.
내 글의 3.0의 시작에는 존엄이 있다. 존엄하고 싶다. 내가 노동자로써 존엄하지 못하니까? 내가 존엄하게 사랑하고 싶으니까? 모르겠다. 다 치워버리고, 결국 나에게 존엄성은 인간성이고, 인간성은 행복하고 아름답게 사는 것이다. 하지만 행복은 찰나의 순간이고 모든 순간 행복할 수 없으니까 존엄하게 살고 싶다고 하는 것이다.
존엄은 책임에서 나온다. 책임은 용기에서 나오고, 용기는 꾸준함에서 나온다. 그리고 꾸준함은 체력에서 나온다. 존엄하기 위해선 책임이 필요하다. 존엄하다는 건, 인간성이라는 건 결국 나의 삶을 책임진다는 뜻이다. 책임은 용기에서 나온다. 책임을 진다는 건 종종 누군가가 모두 Yes, 라고 이야기할 때 소신 있게 No 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더불어 굳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것을 나는 용기라고 생각한다. 그런 용기는 꾸준함에서 나온다. 용기는 내가 꾸준히 해서 비로소 그렇다 아니다 라는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가지는 미덕이다. 그렇지 않고 서는 용기를 낼 수 없다. 꾸준함은 체력에서 나온다. 그 꾸준함이라는 건 결국 체력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이 문장은 사실 처음에 4대 성인, 예수, 부처, 소크라테스, 공자가 모두 우리가 생각하는 이미지와 달리 근육질이었을 것이다 라는 묘사에서 나왔으며, 다른 성인들은 모르지만 예수의 경우 모진 고문을 받은 후 채찍을 맞으면서 십자가라는 2m 이상의 나무 사형도구를 지고 언덕을 올랐다. 그것은 엄청난 체력을 가진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모두 존엄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존엄하다 라는 이야기를 할 때 천부인권을 이야기하는데 천부인권은 고작 헌법 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주의 발달의 산실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천부인권이 보급된 것은 20세기의 광풍 이후에 모더니즘, 인간 이성의 끝을 맛보고 난 뒤 라고 알고 있지만 그 시작이 어디냐 라고 하면 그건 영국의 권리장전과 같은 민주주의 태동과 함께 한다고 생각한다. 천부 인권이 존재하기 전에 사람들은 그저 지배자를 위한 시스템 1, 2, 3, 4 – 100 이었고, 천부 인권은 그런 맥락에서 출발하였으며, 천부 인권과 존엄은 사실 큰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은 예전에 고등학교 때 읽은 “쥐” 라는 그래픽 노블에서 비롯되었는데, 그 그래픽 노블에서 작가는 아버지가 아우슈비츠에서 어떻게 생존하였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해당 내용 중에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도 씻지 않거나, 운동하지 않거나 그런 자포자기한 사람들은 얼마 못 가 죽었다는 장면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천부인권과 존엄의 관계는 마치 불경과 해탈의 관계성 정도라고 생각한다.
이런 이야기들을 하고 싶다. 이것은 내가 어디서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이고, 이런 이야기들을 하기 위해서 책을 읽어야겠다. 고 생각했다. 정말 “쥐” 그래픽 노블에 그런 장면이 있었는지, 정말 천부인권은 모더니즘의 반발로 보급이 되었는지, 민주주의 보급과 태동은 어땠는지 이런 부분들 확인하면, 더 글이 아름다워질 거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만화가들이 하는 레퍼런스 참조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결국 3.0 은 레퍼런스를 나에게서 삶과 사회로 넓힌 것이다.
나는 내 글이 피드백 받는 것이 좋다. 나는 사람들이 내 글을 보고 나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궁금해하고, 존중하는 순간들이 좋았다. 하지만 그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건 나에게 무척이나 애정이 있어야 지만 가능한 일이고, 이러나 저러나 내 글을 읽어준 모든 친구들에게 감사하다. 나는 내 문장이 미려하다는 말도, 글이 엄청 구조적이라는 말도, 단어들이 신선하다는 말도, 굉장히 잘 썼다는 말도, 아쉽다는 말도 모두 좋아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내 글에서 나와의 일체감을 분리하고 리팩토링 하겠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는 마침내 나를 벗어나 나의 주변 5m를 보려고 하고 있다. 내 주변 5m를 바꾸면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말처럼, 결국 내 주변 5 m는 세계가 되는 것이다. 결국 나는 나의 주변 5m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서 세계를 관찰, 탐험하기 시작했고, 나는 이 흥분과 감격을 감추지 못하고 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