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친다. 깊은 파도가 친다. 해안가의 모래는 그저 파도를 받아낸다. 모래는 묵묵히 파도를 받아내고, 해는 내일을 기약하며 달과 교대한다. 삶의 불운을 씻어내는 공간, 나에게 그런 공간은 바다이다. 이건 바다가 되기엔 유약하지만 스무 살이 된 나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 오디세이를 보았다. 어쩌면 그리스 로마신화라는 것은 그 시대 인간의 불운을 치유하기 위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누군가 다리가 부러졌을 때 그래도 나는 신화 속 누구처럼 다리가 부러져서 하늘의 별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은가? 모든 삶에는 저마다의 불운이 있고, 그 불운은 결국은 본인이 취약한 부분에서 생기는 문제지만, 취약하지 않은 사람은 욕망하지 않는 인간, 살아 있지 않은 인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동시에 그 욕망이 불러오는 불운이 얼마나 바보 같으면서 원초적이고, 당연한지 충분히 이해하고 존중하고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로서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 인정은 여러 형태로 존재할 수 있고, 개인은 그 인정 중에 자신이 특히 원하는 형태의 인정을 받기를 바란다. 그런 관점에서 퀴어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 퀴어는 크게 두 가지로 이해된다. 자신이 이성만이 아닌 좋아하는 사람이 사회와 다르거나, 자신이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가 사회와 다르거나. 어쨌든 인정에 대한 것이다. 그것이 자신을 향하거나 누군가를 향한다.

그리고 퀴어의 불운 역시도 취약함에서 나온다. 예를 들어서 나는 동성을 좋아해, 나는 원하는 모습이 되고 싶어, 나는 000을 하고 싶어. 나는, 나는, 인류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인류의 역사는 나의 욕망을 인정해 달라는 투쟁의 역사이다. 인간은 생존만이 아닌 권력과 자본을 욕망한다. 그렇다면 퀴어의 욕망은 자신의 욕망이 다른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충분히 이해하고 존중하고, 때로는 순진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것에 한 걸음 더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이야기가 하고 싶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배우자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 자신이 불쾌감이 줄어드는 방향으로 어떤 조치를 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신은 살아야 한다. 당신은 어떤 이야기를 쓰고 싶은지 나는 묻고 싶다.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법적 지위를 획득하고, 자신이 원하는 외적 모습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나는 결국엔 세상을 등진 이들을 위로하며 글을 쓴다. 우리는 혐오자들을 향해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며 인정해달라고 한다. 하지만 그건 스스로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 성별과 지향성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이다. 성별과 지향성은 이야기의 전부가 될 수 없다. 오디세이는 오디세우스가 집에 오는 길에 겪은 이야기다. 오디세이는 결국 오디세우스가 집에 오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살고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가 결국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 하나의 삶은 하나의 세계이다. 우리의 세계가 나는 그렇게 빈약하지 않다고 믿는다.

자 이런 이야기를 하면 분명 스무 살의 나는 지금의 나에게 물어볼 것이다. 지금 당장 내가 먹고 살고, 불편하고, 불안한데 어떻게 살지를 고민하기 어렵다고, 하지만 그러니까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지금 불편하고, 불안한 것들이 정리되면, 너는 무엇을 하고 있을지 충분히 물어볼 수 있는 거 아닐까? 그걸 같이 고민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인간적이고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고민해 본다.

그럼 다시 나는 나에게 물어본다. 잘난 척하지 말고 너는 어떤 삶을 살고 싶냐고 물어본다. 나는 내가 좋은 엔지니어이길 바란다. 엔지니어는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다. 나는 좋은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길 바란다. 운영 중인 서비스들은 기본적으로 부채(빚)를 들고 있다. 고쳐야 했지만 고치지 못한 문제들, 장기적으로 관찰하면서 수정해야 하는 부분들, 우리는 그런 것들을 운영 부채라고 이야기한다. 삶은 하나의 서비스로서 운영 부채를 쌓아가고 해결하는 것의 연속이며, 나는 그 부채들을 조금씩 해결해 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의 묘비명은 return 0, 마침내 나의 모든 문제가 종결되었음을 의미한다. 프로그램이 정상적으로 종료될 때 쓰는 명령어가 return 0이니까,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종결되는 것이다. 나의 문제는 나의 삶에서만 유효하니까.

나는, 너는, 우리는 이루지 못한 부채들 위에서 위로는 쏟아지는 것들을 정리하고, 밑으로는 쌓인 것들을 해결하면서 인생을 보낼 것이다. 이건 인간 삼라만상이 가지는 진리이다. 그리고 나는, 너는, 우리는 어차피 그 부채들과 부하를 모두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어떤 문제들은 아예 동시적으로 해결할 수 없이 하나를 골라야만 하는 순간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 우리가 압도되지 않길 바란다. 우리는 모든 순간에 분명히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을 것이며, 우리는 그 할 수 있는 것들 속에서 좀 더 바라고 분명한 것들을 고르면서 때로는 부채를, 때로는 자본을 쌓아갈 것이고, 자본과 부채는 자산이 되어 분명히 당신의 세계를 복잡하고 아름답게 만들 것이다. 나는 내가 좀 더 나이스하고 친절해지는 방향으로 이것을 실천해 보고 있다. 퀴어이기 전에, 직업인이기 전에 인간, 나는 결국 인류 삼라만상의 진리에서 벗어나기엔 작은 개인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기록을 남긴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 나의 인정 욕구는 글로 폭발한다. 이것이 어설프고 조롱하고 싶고 때론 사랑스럽고 때론 귀여워도 그 모두 당신도 가지고 있음을, 충분히 존중과 이해를 해주기 바라며, 나 역시도 최대한 선해할 테니 당신 역시도 최대한 선해해주길 바라며, 우리는 이것을 결국 사랑이라고 부르고, 사랑은 이긴다는 구호를 빌려 글을 마무리한다.

죽어가는 모든 것들을 사랑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