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디스버틀러 젠더 트러블 서평
내 생에 젠더 트러블을 읽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젠더 트러블을 평생 안 읽을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그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젠더 트러블을 읽으면서 호르몬 치료를 시작했던 일, 그만 두었던 일, 논바이너리로 라벨링 했던 일들이 하나 둘 지나갔다. ‘젠더는 반복적인 수행이다’ 라고 하는 명제를 정식화한 책, 나는 주디스 버틀러가 제시한 이론 위에서 철학적으로 실천되는 존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 어렵다고 다들 하여 읽고 싶지 않으면서도 평생에 한번은 읽어야지 라고 생각했고, 결국 이렇게 맞이하게 되었다.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은 크게 3부로 나누어져 있다. 1부는 ‘섹스/젠더/욕망의 주체들’, 2부는 ‘금지, 정신분석학, 그리고 이성애적 모태의 생산’, 3부는 ‘전복적 몸짓들’ 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을 통해 3부에 걸쳐서 이성애는 강제적이며 젠더는 근본적인 것이 아닌 수행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1부에서는 섹스라고 일컬어지는 생물학적 성 또한 사회적 담론을 거쳐 자연처럼 보이게 되었음을 설명하고, 이성애 속에서 섹스, 젠더, 욕망이 일관성이 있어보이기를 강제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니체의 ‘행위 뒤에 행위자는 없다’는 발상을 빌려, 젠더를 실체로 보지 않고, 행위를 통해 만들어지는 효과라고 주장하였다. 2부에서는 레비스트로스, 라캉, 리비에르, 프로이트 등의 사유를 비판적으로 읽으며 소녀가 가진 엄마에 대한 동성애적 사랑이 자라면서 동성애가 금기시 되기 때문에 상실되고, 이러한 상실이 우울증적으로 내면화된 결과가 이성애적 정체성이라고 해석했다. 마지막으로 3부에서는 드랙 (Drag)을 예시로 드랙은 원본 젠더를 흉내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원본 젠더 또한 모방의 반복이며 결국 젠더는 원본 없는 모방이며, 양식화된 행위의 반복으로 성립한다, 이것이 젠더의 수행성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전복은 반복 속의 어긋남, 규범을 똑같이 반복하지 못하는 틈, 패러디적 재반복에서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페미니즘 정치가 여성 주체 없이도 가능함을 주장하며, 오히려 여성이 있어야한다는 전제가 배제를 만든다고 주장하였으며, 행위성은 반복을 요구 받는 규범 내부에서 다르게 반복하고 재의미화 하면서 변주되고 수행되고, 트러블을 일으킨다고 설명했다.
방송통신대학교 교재에서는 젠더의 역사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1970년대에 젠더라는 용어를 사회적인 성이라는 의미로 불리는 과정부터 70년대 말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논의, 젠더라는 것은 수행과 인식이다 라는 연구, 섹스와 젠더의 구분의 모호함, 그리고 마침내 현실에 존재하는 다양한 성별관계를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노력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교차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궁극적으로 인종, 젠더, 계급, 민족과 같은 복합적인 요소들이 맞물려서 작동하는 억압을 분석하고 해결한다는 것이 현대 페미니즘의 경향이라고 소개한다. 버틀러의 논의는 서양 철학과 정신분석의 틀 안에서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집중하지만 인종이나 계급은 상대적으로 덜 다룬다. 교재에 나온 교차성 관점에서는 한계로 느껴진다.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은 버틀러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퀴어이론의 토대가 되었다. ‘젠더는 수행된다.’ 라는 개념이 주는 토대가 크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젠더 트러블이 어렵다고 한다. 젠더 트러블이 어려운 이유는 젠더 트러블이 철학적 논문이기 때문이다. 모든 문단은 마치 하나의 함수는 하나의 기능을 하는 잘 짜여진 코드처럼, 하나의 주장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장은 변증법적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텍스트를 읽는 것이 아니라 잘 만들어진 소스코드를 읽는 듯한 느낌을 받았으며 물론 이해의 다소 난해함이 있었지만 내가 읽은 책에서는 옮긴이의 말과 1999년 버틀러의 서문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가이드를 마련해주어서 이해하게 되었다. 다만 당사자로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젠더 수행에 대한 예시로 드랙을 설명하여 젠더가 수행이고 모방이라는 것이 시스젠더 헤테로에도 해당 되는 이야기임에도 드랙으로 한정하여 이해할 수 있다는 오해가 있으며, 그래서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설명이 왜 없지에 대한 의문도 있었으나 젠더 트러블을 다 읽고, 다시 읽는 과정과 성, 사랑, 사회에 대한 설명을 통해 오히려 여성성과 남성성이 무엇임을 정의하는 것이 배제적이고 순환적 오류에 빠진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젠더 트러블을 읽기 전에는 섹스가 생식 기능에 따른 단순한 분류라고 생각하였으나 좀 더 복합적인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결국 섹스를 생식 기능에 따른 분류로만 보는 시각은, 그 분류 자체가 이미 문화적 해석을 거쳤다는 점을 놓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주변 논바이너리 중에 지정성별로 살아가는 이들은 별로 없다. 비록 남성성과 여성성이 엄밀히 정의하기 어렵더라도, 분명히 사회적인 코드로서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코드는 있다. 목소리에 대한 톤, 복장, 머리 길이, 분위기에서 말이다. 젠더 트러블은 철학적 도서이기 때문에 이를 다루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분명 현실적으로는 존재한다. 그래서 나를 비롯한 실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이것에 대한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고, 그래서 내 주변의 논바이너리 대부분은 호르몬 치료를 하였거나 하고 있다. 버틀러에 따르면 젠더의 수행성은 강제된 규범 안에서의 반복이며, 전복은 그 반복이 어긋나는 틈에서 일어난다. 그렇다면 사회적 코드를 의식하면서도 내가 원하는 모습을 조금씩 시도하는 일은 규범 밖으로의 탈출이 아니라 규범을 다르게 반복하는 실천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정치 현안보다는 일상에서 체감 되는 지점을 짚고자 한다. 우리는 레즈비언 부부가 아이를 출산하여 기르고 (규지니어스), 젠더리스 아이돌이 활동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엑스러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트랜스여성들 중에서 IT 종사자가 많은지, (Programmer Socks, 이케야 상어 밈 등 하나의 이미지로 굳어져 있다.) 왜 트랜스남성들은 가시화가 별로 되어 있지 않은지, (트랜스젠더의 논의에서 트랜스 남성에 대한 논의는 크게 보이지 않는다고 느낀다.) 여전히 왜 한국의 일부 페미니즘은 트랜스 배제적인지, (숙명여대 A씨 사건) 그리고 여전히 트랜스여성은 웃음거리가 되는지와 같은 일상적인 부분에서 여전히 젠더 트러블적인 사람들은 피로함을 느끼며, 과한 스트레스와 정신병리적 증상을 동반하기도 한다.
스무살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사건들을 겪으며 내가 내린 결론은 ‘할 수 있는 것부터 한다’ 였다. 삶을 안정적으로 만들고, 그 위에서 내가 하고 싶은 표현을 모든 상황이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상황과 장소를 만들고, 나의 주변을 돌보는 일이 내가 그동안 경험으로 내린 결론이었다. 그리고 젠더 트러블을 읽으며 종종 직관은 크게 배반당할 수 있다는 것과 젠더 트러블에서 나온 푸코와 보부아르, 헤겔에 대해서도 읽고 탐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이런 철학서를 읽는 경험이 나의 경험과 결합하여 나의 삶을 가이드하고 스스로가 설명할 수 있기를 소원해본다.